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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플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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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플라토

 

부산대학교 - PUSAN NATIONAL UNIVERSITY (PNU)

부산광역시 금정구와 경상남도 밀양시, 경상남도 양산시에 소재한 국립 종합대학.

현재 국내에서 유일하게 의학, 치의학, 한의학, 간호학, 약학, 법학 단과대학을 모두 갖춘 국립대학이지만 거점국립대학교 중 유일하게 수의과대학은 없다. 부산대학교는 밀양대학교와 통합 이전에는 농업생명과학대학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부산광역시 금정구 장전동의 부산캠퍼스와 서구 아미동1가의 아미캠퍼스,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범어리의 양산캠퍼스(의생명과학캠퍼스), 밀양시 삼랑진읍 숭진리의 밀양캠퍼스(나노바이오캠퍼스)로 이루어져 있다. 1946년에 두 개의 학부(지금의 단과대학)로 출발하여 2015년 기준으로 13개의 단과대학, 1개의 대학원, 5개의 전문대학원과 7개의 특수대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1946년 5월 15일 문교부는 부산수산전문학교를 대학으로 승격시켜 종합대학의 1개 단과대학(수산과대학)으로 편입시키고, 그와 별도로 인문과대학을 신설하여 인문계 1개 단과대학(인문학부)과 자연계 1개 단과대학(수산학부) 체제의 국립 부산대학교(종합대학) 설립을 인가했는 데, 학교의 명칭은 ‘부산대학’으로, 학부(단과대학)는 인문학부와 수산학부로 개교하였으며(이때의 학부는 오늘날의 단과대학(Faculty)에 해당하는 것으로, 1946년 3월 7일에 공포된 대학령 제2조 후단에는 인문계 및 자연계의 학부가 병설될 때는 2개 이상의 학부로써 '종합대학교'를 구성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1946년 7월 예과시험을 거치고, 1946년 8월에는 대학 총장으로 아서 린 베커(Arthur Lynn Becker 1879~1979, 한국명 백아덕白雅悳) 박사를 임명하여 1946년 9월 입학식을 거행하고 1년 정도 종합대학으로 운영되다가 1947년 7월 수산과대학이 '국립 부산수산대학'으로 분리됨으로써 종합대학으로써 '국립 부산대학교'는 사실상 와해되었다. 1948년 7월 '국립 부산대학교 인문과대학'의 명칭을 '국립 부산대학'으로 변경하고 1948년 9월 문리학부, 법학부, 상학부 3개의 학부를 설치하고 4년제 대학으로 운영되다가 그 후 1953년 4월 1일에 국립 부산대학교설립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하고, 4월 3일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같은 해 9월15일 국립학교설치령이 공포됨에 따라 다시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총장으로 같은 해 11월 26일 윤인구 박사가 취임하였다.

 

 

부산대 플라토 : https://plato.pusan.ac.kr/

 

 

당시 1도 1국립대 원칙이 적용되던 상황에서 서울대학교를 제외하면 다른 지방국립대학의 명칭에 모두 도(道)이름을 사용했던 것과 달리 경남권 국립대학의 이름을 부산대로 지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일제 강점기 부산은 경성(京城)에 이어 조선의 2도시였고, 조선 최고의 국제 무역항이자 상공업 도시였다. ‘부산(釜山)’이라는 도시명은 이미 국제화되었고, 향후 정부의 지방행정구역 개편시 특별시로 승격(그러나 직할시로 그침) 가능성[7][8]이 있으므로 서울대학교의 경우와 같이 부산이라는 도시명을 사용한 것이다. 그 당시 부산부(釜山府, 지금의 부산시)는 경상남도에 있는 하나의 도시에 불과하므로 “경남대학교”로 고집하는 인사들도 있었으나, 최종적으로 문교부와 경상남도의 원안(原案)대로 “부산대학교”로 결정되었다.

특히, 윤인구 초대 총장의 제자인 정권섭(부산대 56학번) 前동서대 총장에 따르면, "윤인구 초대 총장(경상남도 학무국장)은 전후의 폐허 속에서도 부산의 발전 가능성과 잠재력을 높이 보고 '부산대학'이란 이름을 고수했다"고 전했다. 【출처】 국제신문 2016.3.20. 기사 참조 그 당시(1946년)에는 행정구역상 부산이 경상남도에 소속되어 있었고, 수도권을 제외한 다른 지방의 국립대학들이 모두 해당 도(道)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었던 시절에 교명을 '부산대학교'라고 지었던 것은 초기 국립대학인 부산대를 세우면서 "부산(釜山)"이라는 도시의 발전 가능성과 잠재력을 높게 본 선각자들의 혜안(慧眼)이라고 부산대는 자신들의 교사(校史)에 기록하고 있다.(부산대학교 60년사, 세종문화사, p75~76 참조) [9]

결론을 말하자면, 직할시 승격을 염두에 두어서 ‘부산’을 붙였다는 주장은, 직할시 승격이 개교 후 20년 가까이의 긴 텀이 있었으므로 다소 짜맞추어진 경향이 없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에는 정부 직할의 독립 도시 개념이 특별시 외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특별시 승격 시도가 1949년, 즉 개교 3년 후부터 꾸준히 이어져온 점으로 미루어 직할시가 아닌 특별시 승격을 염두에 두고 부산대학교로 지은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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